네 정체는 뭐냐?

yungcho.egloos.com

포토로그 마이가든



가싼 카나파니 「하이파에 돌아와서」 감상

중동문학에는 다양한 무늬의 결이 존재한다. 그 중 필자가 중동문학의 현실 인식에 대해 유의미하다고 여긴 문학은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사이의 갈등에서 파생된 제반 소설이었다. 헌데, 자료조사를 하던 중, 한국에 소개된 이스라엘에서 창작된 소설의 양이 피억압국인 팔레스타인 보다 월등 적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나마 발견한 소설조차도 유머 꽁트집이었으니, 억압자와 피억압자의 문학을 비교 분석해 보려던 필자의 야망(?)은 산산이 부서진 셈이다. 그리고 그냥, 자연히, 다음과 같은 문장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억압자는 웃고 있다.

*

가싼 카나파니의 작품을 읽고 있는 사이, 필자는 이스라엘이 레바논남부를 '공습테러'했다는 소식을 들었다.(2006년 말 현재) 그리고 한겨레신문에 실린 박노해의 레바논 르포들을 읽으면서 무력감을 느꼈다. 중동 도처에서 학살이 벌어지고 있다. 그런데 학살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권위 있는' 서방신문들은 학살자, 이스라엘의 신변을 보호해준다. 학살자들의 누가 봐도 명백한 '테러'행위를 '공습'이란 말로 바꿔치기 한다.(마치 정당한 공격을 감행한 듯이) 그리고 이에 무력으로 저항하는 행위를 ‘테러’라 부른다. 이스라엘에 대한 주변국 국민들의 증오는 커져가고 이스라엘 저항 세력에 대한 지지는 하늘을 모르고 치솟는다. 이스라엘은 그런 사람들에게 미사일 발사와 철저한 이동 검문과 통제로 답례한다. 그리고 다시 눈덩이처럼 불어가는 증오… 무력감을 가다듬고 나는 책을 펼쳤다. 어쩔 수가 없는 일이다. 어쩔 수가.

팔레스타인 작가들은 무심결에 내뱉은 내 혼잣말을 듣고 그들의 작품으로 대답한다.

‘우리는 열심히 대응하고 있소! 당신은?’

*

「하이파에 돌아와서」(이하 「하이파」)를 읽으면서 나는 어렸을 적 탐독했던 『어린이 탈무드』의 한 에피소드를 떠올렸다.

그 에피소드는 이스라엘의, 유대인의 애국심을 말하고 있었다. 중동전쟁이 터지자 타국에서 유학 중이던 이스라엘의 젊은이들은 입대하기 위해 모국으로 속속 돌아온 반면, 이스라엘과 전쟁 중인 다른 나라들의 젊은이들은 징병당하지 않기 위해 전전긍긍한다. 이런 ‘애국심’의 차이로 이스라엘은 승리를 거머쥐었고, 다른 나라들은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에피소드의 결론이었는데, 왜 나는「하이파」를 읽고 기억에도 희미한 이 이야기를 떠올렸을까? 그것은 힘 있는 자(이스라엘)의 일방적인 거짓결론이 힘없는 자(팔레스타인人)의 억울함과 분노를 왜곡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대인과 아랍인에게 팔레스타인 지역에서의 국가수립을 동시에 약속한 영국은 1948년, 하가나(유대인 지하군사조직)에게만 영국군 철수시기를 알려준다. 영국군이 철수하자 하가나는 공격을 개시한다. 그리고 결국 아랍인들의 저항을 물리치고 유대인은 이스라엘을 건국한다.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1000여년 동안 살고 있던 100만 아랍인들은 난민이 된다.

「하이파」는 이스라엘 건국 20년 후의 팔레스타인을 이야기하고 있다. ‘하이파’는 지명(地名)이기도 하지만 이스라엘이 점령한 팔레스타인 지역을 상징한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피난민들에게 자국 땅을 '방문'할 수 있게 '허가'하자 사이드는 하이파에 돌아온다. 그러나 공습 때문에 두고 올 수 밖에 없었던 아들은 유대인 부모 아래서 자라 완전한 유대인이 되어있다. 비통한 기분에 잠겨 토해 놓는 사이드의 말은 팔레스타인에서 쫓겨난 팔레스타인人들이 하고 싶은 말과 다름없다.

모든 문은 오직 한 가지 방법으로만 열려야 했던 거요. 그렇게 열린 게 아니라면 이건 그대로 닫혀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 거지.

당신이 하이파를 본 게 아니야, 놈들이 당신에게 보여준 것 뿐이지

나는 결국 자네(사이드의 아들)를 찾아내지 못하고 말았네. 이제는 앞으로도 자네를 찾아낼 가망은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네.

당신은 조국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겠소. 이봐요. 소피아. 조국이라는 것은 말이야. 이따위 모든 일이 생겨서는 안 된다는 바로 그것이야.

가싼 카나파니는 등장인물의 입을 빌어 현실의 모순을 성토하는데, 훌륭한 소설적 얼개 안에서 필자가 표하고자 하는 주장이 잘 녹아들어 있다. 자신의 작품에서 이광수처럼 덜 여문 계몽주의를 부르짖거나, 유대인의 잘못을 작품 내에서 거칠게 성토하는 따위 우리의 일제시대 문학에서 있었던 잘못을 범하지 않는다. 단지, 가장 끔찍하고, 고통스러운 삶의 한가운데를 헤집어서 우리에게 넌지시 던져줄 뿐이다. 그리고 슬픈 눈으로 우리를 응시할 뿐이다.

*

나는 아무래도 그들을 명확히 직시할 수가 없다. 나는 그들과 다른 곳에 외따로 떨어져있기 때문이고 내 최우선순위에 그들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학은, 좀 더 구체적으로, 소설은, 그들의 구체적인 아픔과 고통을 짐작할 수 있게 해주었다. 물론 총체적인 수준에서의 그들의 고통을 알 수는 없지만, 대략적인 아픔은 짐작할 수 있게 했다는 말이다. 설명문 같은 서술양식을 통해 그들의 아픔을 짐작하기란 어렵고 힘들지만, 문학이란 프리즘을 통해 그들의 아픔을 비춰보면 딱딱한 설명보다 훨씬 그들을 이해하기 쉽다. 그리고 그들의 어려움을 향해 무언인가 해야 할일이 없는지, 생각해 보게 된다. 이것이 바로 문학의 효용성이란 것일 것이다. 「하이파」를 읽고, 그들의 현실은 일제하의 우리나라와 그리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알았다. 천년동안 살고 있던 곳에서 쫓겨난 팔레스타인인들. 수천년 전의 기록인 성서를 들이대고 자신들의 땅이라며 그들을 핍박하고 있는 이스라엘인들. 그리고 돈과 권력으로 언론과 미국정부를 좌지우지하며 이스라엘을 지원하고 있는 다른 지역의 유태인들. 그들은 홀로코스트로 무엇을 배웠는가? 다른 민족을 어떻게 하면 잘 핍박할 수 있는지에 대한 방법을 전수 받았는가?

*

문학평론가 이명원은 말했다. “아픔이라는 말은 추상이지만, 아픈 사람들은 구체적으로 아프다. 위로의 말조차도, 아픈 자의 생생한 고통에는 동참할 수 없다. 구체적인 통증 안에서, 앓고 있는 자는 그렇게 홀로 아프다.“ 옳은 말이다. 누구도 그들의 생생한 고통에 동참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따스한 방에서 단지 그들의 고통을 상상하며 이 글을 쓰고 있다.

그래도, 안타깝다는 생각은 해야겠다. 그들에게 위로의 말은 해줄 수 있어야겠다.


트랙백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TrackbackURL : http://yungcho.egloos.com/tb/3962562 [도움말]
  • 팔레스타인의 치료받지 못한 상처들 2009/01/31 00:22 #

    가싼 카나파니의 소설을 다시 읽다 아부 까이스, 아싸드, 마르완. 팔레스타인 작가 가싼 카나파니(Ghassan Kanafani)의 단편집 에 실린 단편 「불볕 속의 사람들」의 주인공 이름들이다. 언뜻 보기에 낯설다. 아마도 그 낯섦은, 아랍소설을 국내에서 접하기 흔치 않다는 점을 알려주는 듯 하다. 하지만 이들의 이야기는 쉽게 접어버리기 어려운 묵직한 감동을 지니고 있다. 마이클 윈터바텀의 영화 에서 소년은 런던에 가..... more

덧글

덧글 입력 영역